조선후기 영정 시대의 실학사상가이며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연암집 燕巖集≫권12 별집(別集)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관내정사 關內程史」 7월 28일자에 실려 있다. 「관내정사」에 의하면, 이 글은 연암이 북경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 묵었던 옥전현(玉田縣)의 심유붕(沈由朋)의 점포 벽상에 걸려 있는 격자(格子)의 기문을 동행한 정진사와 함께 베껴온 글로서, 그 베낀 동기는 국내에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혀 배를 웅켜잡고 한바탕 웃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작품에는 원래 작자 성명과 제목이 없었으나, 근세 중국인이 비분하여 지은 작품인 것 같고, 글 중의 ‘虎叱’ 두 글자를 뽑아 제목으로 삼았다고 했다. 작품의 줄거리는 먼저 제왕의 위엄과 덕성으로 비유된 범이 등장하여 창귀들과 먹을 것을 의논하는 장면이 제시된 다음,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는 위학자(僞學者)가 동리자(東里子)라는 수절 과부의 방에서 밀회(密會)를 하다가 성이 다른 동리자의 다섯 아들에게 들켜 도망가다가 들판의 똥구덩이에 빠진다. 간신히 기어나오니 앞에 범이 있어 놀란 북곽선생이 아첨하는 말을 하니 범은 더러우니 가까이 오지 말라 한다. 그리고 범은 짐승보다 더 잔악한 인간들을 비판하고 범의 어짐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이에 북곽선생이 머리를 굽혀 용서를 빌고 명(命)을 기다렸으나 오래도록 조용하여 머리를 들어보니 범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때 새벽 일찍 밭에 나온 농부가 무엇하고 있느냐고 묻자, 북곽선생은 ‘하늘이 비록 높다 해도 머리 어찌 안 굽히며, 땅이 비록 두텁다 해도 어찌 조심스럽게 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근엄하게 말했다. 이 작품의 중요 쟁점은 작자 문제이다. 즉, 「관내정사」의 기록을 허구의 언어로 해석하여 연암이 창작한 것을 중국인이 지은 것처럼 꾸민 것이라는 ‘연암 창작설(燕巖創作說)’ 또는 ‘중국인 가탁설(中國人假託說)’과, 원작자는 이름 모를 중국인이고 그 작품을 연암이 첨삭 가필한 것이라는 ‘중국인 원작설(中國人原作說)’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전지(前識)(「관내정사」 옥전현 심유붕의 점포에서 작품을 얻게된 경위에 대한 기록)’와 본문(本文)과 후지(後識)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호질>이라고 할 때는 본문만을 가리킨다. 이 작품은 우언(寓言)으로서 대화 형식에 의해 서술자의 의도를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연암은 ‘후지’에서 이 글은 근세 중국인이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으로서 청조(淸祖)의 위선적인 정책과 그러한 청조에 곡학아세하며 일신의 안주를 추구한 한족(漢族) 출신 유학자들에 대한 풍자 비판이라고 했다. 그러나 연암의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풍자 대상은 마땅히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곡학아세와 부정한 행위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에 대한 풍자 비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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