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국문필사본·국문활자본·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 南征記>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서포연보 西浦年譜≫(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李縡)가 <구운몽>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구운몽>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공(空)’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구운몽>은 ≪금강경≫이 소설화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이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렸다. 용왕의 후대로 술이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연화봉을 구경하며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양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곧 집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九士良)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으로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두 사람이 인연을 맺도
소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