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었다고 전하는 고전소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은 이식(李植)의 ≪택당집 澤堂集≫ 별집(別集) 권15 <산록 散錄>에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허균을 <홍길동전>의 작자로 여겨왔다. 그러나 ≪택당집≫의 기록은 이식의 사후(死後) 송시열(宋時烈)이 교정(校正)·편찬(編纂)한 것이어서 그 신빙성이 떨어지며, 허균이 처형될 때의 죄목에 이 작품을 지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허균은 <엄처사전 嚴處士傳>·<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장산인전 張山人傳>·<남궁선생전 南宮先生傳>·<장생전 蔣生傳>과 같은 한문소설을 여러 편 지어, 실존한 방외인(方外人)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또한 뛰어난 지략을 갖고 있는 인물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백성들을 수탈하는 지방 수령들을 응징하는<홍길동전>의 주요한 내용은 허균의 생각이 압축되어 있는 <유재론 遺才論>·<호민론 豪民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택당의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실증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재 전하는 <홍길동전>에는 17세기 말에 실재했던 인물인 장길산(張吉山)이 언급되는 등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그대로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홍길동전>의 원본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세부적인 내용과 표현에서 상호간에 차이가 있는 후대적 이본(異本)이 많이 전해온다. 판각본·필사본·활자본이 다 있다. 판각본에는 경판본과 안성판본, 완판본이 있다. 경판으로는 야동본(30장)·한남서림본(24장)·어청교본(23장)·송동본(21장) 4종이 있으며, 안성판으로는 23장본·19장본 2종이 전한다. 이 외에 완판 36장본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89장본과 86장본, 52장본, 21장본이 있으며, 한문 필사본으로는 <위도왕전 韋島王傳>이 유일하다. 활자본으로는 회동서관·덕흥서림 등에서 간행한 것이 다수 전한다. 이들 이본은 다시 경판계열·완판계열·필사본계열로 나눌 수 있다. 경판계열에는 경판본 전부와 안성판본 및 필사 21장본이, 완판계열에는 완판본과 필사 52장본이, 필사본계열에는 한문본과 필사 89장본, 필사 86장본이 각각 속한다. 현전 <홍길동전> 가운데 가장 오랜 최선본(最先本)은 경판 24장본의 제1장에서부터 제20장까지이며, 원래의 <홍길동전>의 전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경판 30장본이다. 완판본은 후대적 부연의 성격이 강한 이본으로, 경판에서 서얼차별(庶孼差別)이라는 신분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달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식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필사 89장본은 내용이 가장 풍부한 이본이며, 한문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본으로 국문본을 번역한 것이다. <홍길동전>이 형성된 배경으로 <수호전 水滸傳>·<서유기 西遊記> 등 중국소설과의 영향관계가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부분적인 삽화나 인물유형의 공통성은 인정되지만, 두 작품 사이의 전반적이고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에 따라 연산군(燕山君)대의 홍길동(洪吉同), 명종(明宗)대의 임꺽정(林巨正), 선조(宣祖)대의 이몽학(李夢鶴), 광해군(光海君)대의 칠서(七庶) 등 국내의 역사 사실에서 <홍길동전>의 사건, 인물 형성의 배경을 추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국내적 형성배경으로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실재 인물 홍길동의 전(傳)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庶子)이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賤生)인 탓으로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禍根)이 될
소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