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고차존 (최남선 역사 연구 논문)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들의 총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와세다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이후 이광수와 함께 소년회를 결성한다. 또한 유길준이 조직한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1907년 5월, 귀국한 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7년 11월 이광수 등과 함께 잡지 소년지를 창간한다. 소년지에서 그는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고, 이광수는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발행한 잡지 《소년》지는 근대적 종합잡지의 대표적인 잡지이며 어린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 중 초기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후일 그가 소년 잡지를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지기도 했다. 최남선은 인쇄시설을 추가로 구비하여 1908년 신문관(新文館)을 창설하였다. 처음 건물과 비용이 넉넉하지 않아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하였으며 후일 사세를 확장하여 경성시내로 사무실을 옮겼다. 여기서 그는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1909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3월에는 도산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내면서 청년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10월 그는 조선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고서를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한편 그는 조선광문회를 통해 조선어 사전 편찬 계획을 세우고 구상했었다. 조선어 사전 편찬계획 세우는 그 과정에서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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