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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동양학

김덕균 | 글항아리
  • 등록일2012-08-31
  • 파일포맷pdf
  • 파일크기1 K  
  • 지원기기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태블릿,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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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공자의 철학은 왜 서민적일까? 원효는 정말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셨을까?
퇴계가 페미니스트라니? 충성이 왕을 비판하는 거라고? 명당이 풍수지리와
별 상관없는 말이라니?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예절의 출발이라고?
고정관념을 깨는 통렬한 동양학 강의
북장단처럼 즐겁게 의식을 치는 통찰
즐거운 동양학, 통쾌한 앎을 위하여

동양학은 동양에서 여전히 경외시되고 있다. 충忠,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성誠, 도道 등은 동양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이지만, 개념으로만 머물 뿐 그 실체를 현실에서 체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는 동양학에 대한 낡은 접근 방법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몸과 마음, 곧 감성적인 접근으로 풀어가야 할 때와 머리, 곧 이성적인 접근으로 풀어야 할 때를 구분하자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직관이고, 직관의 중심에는 몸과 마음이 있다. 또한 잘 정리된 학문으로서의 동양학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동양학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해소하자고 말한다. 틀지어진 이론으로서의 동양학이 실제와 따로 가거나 이해가 불가능할 때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연구답사 등으로 동아시아 각국을 활보하며 깊이 흡입한 견문을 동양 고전과 연결시켜가며 논의를 전개시킨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삭혀 먹는 문화’와 한국의 ‘비벼 먹는 문화’는 단순히 젓갈류나 발효식품을 좋아하고 비빔밥을 좋아하는 그 나라의 음식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깊게는 모든 타문화를 끌어들여 오랜 시간 은근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중국인의 뿌리 깊은 중화의식과 맞닿아 있고, 그 어떤 종교나 문화적 관습도 특유의 공동체주의로 버무려내는 한국인들의 집단의식과 직결되어 있다.
저자는 말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보살피고 원기를 회복시켜줘야 하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제사를 지낼 때의 제祭라든지, 예의를 차리라고 할 때의 예禮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동양학의 뼈대라고 할 만한 말들의 옛 흔적을 찾아보았다. 고대문화 여행을 통해 개념이 갖는 본래 의미를 찾아 갈라진 종교와 흩어진 대중을 소통시켜보려는 의도에서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이 책은 동아시아 문화의 본질과 그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 등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법도 담았다. 이 책은 이것을 크게 네 가지 다른 각도에서 정리했다. 첫째,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전통문화의 긍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고, 혹 주변에서 갖고 있던 선입견을 해소하려 했다. 둘째, 한국 문화의 저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전통 가치 속에서 확인하고 재조명했다. 특히 가족주의와 효사상이 갖는 강한 한국적인 힘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증명해보았다. 셋째, 우리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밝혀보았다. 마지막으로 세계 패권국을 꿈꾸는 우리와 이웃한 중국의 야망을 되짚어보고, 동아시아 시대에 우리가 어떤 채비를 갖춰야 할지 문화적으로 점검해보았다.
제목 ‘통쾌한 동양학’에는 동양학을 알아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통’했으면 하는 것과, 또 그 과정이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본문의 주요 내용
제1부는 ‘오래된 말들의 부활’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동양학을 이루는 중심 말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공부, 장례, 차례, 충성, 명당, 역, 예, 문명과 야만, 유학, 죽음 등이 그것이다. 제1부 3편 <장례의 기원>에서는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들판에 그냥 버렸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온갖 짐승과 벌레가 시체를 파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 시신이 바로 자신의 부모인 것을 알고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부모의 시신을 땅에 깊게 묻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했다는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첸무錢穆는 이를 토대로 “장례, 제례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입장에서 드리는 게 아니고, 또한 풍속이 사람을 강압해서 그런 것도 아니며, 인류 효심의 자연적인 요구이며 경향일 뿐”이라고 말했다. 널리 알려졌듯 기독교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금지시켰다. 최근 천주교는 이를 고유의 예법으로 인정하고 다시 허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금기는 동양문화에 대한 오해나 무지 혹은 무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1부 7편 <충성에 대한 오해>를 보자. 권위주의 시대를 거쳐온 한국인들에게 충성은 ‘자발적인 절대복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래 동양학의 핵심 개념으로서의 충성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춘추좌전』의 환공 6년을 보면 “군주가 백성을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충이다”라고 했다. 충을 군주에 대한 백성과 신하의 도리라 하지 않고, 백성에 대한 군주의 도리를 충이라 한 것이다. 충을 상호 배려 개념으로 사용한 경우로 일방적·수직적 개념으로서의 충성과는 다른 차원이라 하겠다. 『순자』 「신도」 편에는 “명령을 따름으로써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순종이라 이르고, 명령을 따름으로써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아첨이라 이르며, 명령을 거스름으로써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충성이라 이르고, 명령을 거스름으로써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찬탈이라 이른다”고 했다. 여기서는 ‘명령을 거역한다 해도 군주를 이롭게 하면 충’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딱딱하게 굳은 동양 사상의 핵심 개념들이 원래 출발선에 돌려놓고 그 가치로움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있다. “명당이란 본래 세상을 밝혀준다는 의미였지, 풍수론과는 무관했다”(51쪽)는 1부 8편의 <명당에 대한 오해>, “한 그루의 나무를 베더라도 또 한 마리의 짐승을 잡더라도 때에 맞추어 하지 않으면 효가 아니다”라는 공자의 말을 통해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효 사상과 자연보호를 연결시키는 <벌목과 사냥이 효와 무슨 관계일까>, 고대 중국에서 예禮는 이履와 통했고, 이것은 예절이라는 말이 원래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실천적 덕목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친 13편 <예는 발을 열심히 움직이는 것> 등을 보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과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외에도 이 책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흥미로운 대목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제1부 11편 <가난함이 공자를 만들었다>를 보면 젊은 시절 공자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창고 관리와 목장 관리 등의 말단직에 있으면서 가난한 백성들과 가까이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었기에 그의 사상이 서민과 괴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19편 <퇴계가 페미니스트인 이유>에서는 가장 보수적일 것 같은 영남 유림의 거두 퇴계 이황의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퇴계는 첫째 부인 사후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할 때 아내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장애인임을 알고도 선뜻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기묘사화로 유배된 권질의 딸이었는데 권질은 부족한 자식을 받아준 사위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고자 서울 집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퇴계는 이를 거절했다. 퇴계는 이 부인이 빨간 천으로 옷을 기워도 그냥 입고 나갔고, 산나물과 가지나물로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해도 조금도 나무라지 않고 공대하고 밥상을 대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부인을 돌보며 살아왔지만, 퇴계가 장인 권질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동으로 내려간 사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정도로 권씨 부인은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만큼 정신박약의 병을 앓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퇴계는 여자의 재혼이 엄격히 금지되던 시대에 둘째 며느리의 재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성사시켰다. 며느리의 인간적 삶을 먼저 고려했던 것이다. 재가한 여자의 자식은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며느리의 재가가 알려질 경우 퇴계와 그 가문이 받아야 할 치욕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퇴계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이 이 사실을 알면 퇴계의 삶과 사상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보이지 않겠는가.
그 외에도 이 책엔 중국의 오래된 중화주의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는 <문명과 야만의 차이>, 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이라는 선입견을 반박하는 <유교는 경제를 무시한 적이 없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를 그 주창자들이 나고 자란 자연과 도시환경에서 찾아보는 <주자학은 산에서, 양명학은 도시에서>, 신라의 화랑도와 원효의 해골바가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설화적 이야기들의 왜곡된 측면을 짚는 글들, 중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 중국인 학생들과의 교류에서 얻어낸 일상적 통찰들 등 다양하고 풍부하게 동양학을 되살려내고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 녹여낸다.

저자소개

김덕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중국 산동사회과학원 박사후과정(Post-Doc)을 수료한 후, 성균관대, 중앙대, 동덕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중국 산동사회과학원 연구학자, 산동사범대학 외국인 교수, 서일대학 교양과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공문의 사람들』 『새 시대를 꿈꾸며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그림으로 읽는 동양의 효문화』 『명말청초 사회사상』『동양사상』(공저) 『왕양명 철학연구』(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명이대방록』 『잠서(전2권)』 『역주 고문효경』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공역) 등이 있다. 현재 동양학의 즐거움과 한국의 효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대중강연에도 힘쓰고 있다.

목차

머리말_ 즐거운 동양학을 위하여
제1부 오래된 말들의 부활
하나 | 공부를 무기로 삼는 사회
둘 | 몸과 마음으로 하는 공부
셋 | 제사와 구더기의 관계
넷 | 제사를 지내는 진짜 이유
다섯 | 차례인가, 다례인가, 주례인가
여섯 | 군주는 배, 서민은 물
일곱 | 빗나간 충성
여덟 | 명당明堂에 대한 오해
아홉 | 역易에 숨겨진 뜻
열 | 한자의 수는 왜 계속 늘어날까
열하나 | 가난함이 공자를 만들었다
열둘 | 벌목과 사냥이 효와 무슨 관계인가
열셋 | 예禮는 발을 열심히 움직이는 것
열넷 | 오랑캐, 창조와 집적의 차이
열다섯 | 신라의 화랑은 어떻게 변질되었나
열여섯 | 유교는 경제를 무시한 적이 없다
열일곱 | 당나라의 절묘한 성경 번역
열여덟 | 원효는 정말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셨을까
열아홉 | 퇴계가 페미니스트인 몇 가지 이유
스물 | 주자학은 산에서, 양명학은 도시에서
스물하나 | 내용이 좋아도 포장이 지나치면
스물둘 | 죽음에 대한 동양적 고찰
스물셋 | 역사 속의 유가문화
제2부 고전의 눈으로 읽는 현실
하나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둘 | 세계화시대 세계화하지 못한 것
셋 | 문화 포용정책의 위력
넷 | 날로 먹는 나라, 삭혀 먹는 나라
다섯 | 일본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효문화
여섯 | 자연재해가 만든 일본인의 품성
일곱 |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명당
여덟 | 이상사회, 아무것도 안 해야 이뤄진다?
아홉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열 | 왜란 때 의병의 배후에 있었던 것은
열하나 | 경종이 후사를 두지 않은 진짜 이유
열둘 | 동양의 가족은 마치 생명체 같다
열셋 | 가족주의의 재활용은 가능한가?
열넷 | 가족해체와 애완동물
열다섯 | 멀수록 더 간절해지는 효
열여섯 | 고산족의 살인에 종지부를 찍다
열일곱 | 지하철만 타면 눈을 감는 사람들
열여덟 | 오래된 주제, 선과 악
열아홉 |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화근이다
스물 | 회초리와 교육
스물하나 | 서당의 작은 역사
스물둘 | 황제도 스승 앞에서는 예를 갖췄는데
스물셋 | 줄 세우기 교육, 과연 옳은가?
스물넷 | 공공의 심부름꾼에게 바라는 것
스물다섯 | 발해는 발해일 뿐
스물여섯 | 단군릉은 어디에?
스물일곱 | 동방예의지국, 서방예의지국
스물여덟 | 군자 같은 소인, 소인 같은 군자
스물아홉 | 현대판 합종연횡
서른 | 아시아적 가치의 경쟁력
서른하나 | 유교문화, 재활용 가능할까?
서른둘 | 밥 하는 사람, 밥 먹는 사람
서른셋 | 진시황과 베이징 올림픽
서른넷 | 일반화된 중국의 대對 한반도 인식
서른다섯 | 문화민족의 저력
서른여섯 | 중국의 편협한 애국주의 열풍을 염려하며
서른일곱 | 중국, 희망인가 두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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