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와라를 배경으로 한 소년 소녀들의 성장 소설
“에도 시대의 마지막 여인이자, 메이지 시대 문단의 불꽃”으로 불리는 히구치 이치요(?口一葉, 1872~1896)의 대표작이 성균관대학교 임경화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이치요의 작으로 평가받는 「키 재기」를 비롯해, 「섣달그믐」, 「십삼야」, 「나 때문에」 등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치요의 작품은 그녀 자신의 비운의 생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치요는 에도 시대가 저물고 근대 메이지 시대가 막이 오를 무렵에 태어나 24년간의 짧은 생을 살다 갔다. 오빠와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호주가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이치요는, 비록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소설을 썼지만 당시 여성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보여 준 협소한 세계를 넘어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고뇌를 언어화함으로써 작품 세계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호구지책을 넘어 영원성을 추구함으로써 소설의 무궁한 가치를 보여 주었다.
그녀의 인생은 비록 가난의 질곡으로 점철되었지만, 사후 일본 근대 최고의 여성 작가로 자리 매김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메이지 문단의 한 평자는 “우리 문단이 지난 메이지 시대 24, 25년간 줄곧 잠만 자다가 꽃을 피우고 춘풍이 한꺼번에 불어 전성을 이룬 것은 모두 이치요의 작품 때문이다”라고 했고, 작가 모리 오우가이는 그녀에게 “진정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004년 일본 정부는 이치요를 새 오천 엔 권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대표작 「키 재기」
「키 재기」는 히구치 이치요가 죽기 10개월 전에 완성한 것으로,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직 에도 시대적인 활기가 남아 있는 요시와라 유곽을 배경으로 한 소년 소녀의 성장 이야기다. 소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미도리는 요시와라의 최고급 유녀의 동생으로, 가족들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와 요시와라에 인접한 기방의 숙소에 산다. 부모는 유곽의 일을 돕고 있으며, 미도리도 장래에 언니 못지않은 유녀가 되도록 공주처럼 키워진다. 요시와라의 향락적인 분위기에 들떠서 밝고 쾌활하게 자란 미도리는 돈도 잘 썼기 때문에 ‘큰길파’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초키치를 중심으로 하는 ‘골목파’ 아이들은 이들 큰길파와 늘 대립했다. 골목파는 큰길파에 지지 않으려고 용화사 주지의 아들인 신뇨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8월 축제 때 큰길파의 행사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그것을 말리는 미도리에게 초키치는 “언니 뒤나 이을 비렁뱅이 년” 하고는 흙 묻은 짚신을 던졌다. 이 사건 이후 미도리는 그간 남 몰래 연정을 품고 있던 신뇨를 원망하게 되지만, 역시 언니가 최고의 유녀라는 사실에서 상처 받은 자존심을 달랜다. 그 후로 미도리는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서만 지내다가 11월 축제에 유녀처럼 머리를 올린 뒤로는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갑자기 어두워진다. 때마침 신뇨도 승려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는데, 떠나기 전 미도리네 집 문간에 남몰래 수선화를 놓고 간다.
이치요는 ‘예비 유녀’ 미도리가 요시와라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 과정을 축으로, 자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사회의 저변에서 살기를 강요당한, 근대의 소외자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그림으로써 에도와 메이지를 잇는 다리를 놓았다. 이는 종래의 여성 표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 중류 계급에서 빈곤층으로 급전직하하여 정혼자에게 파혼을 당하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고 힘든 노동을 경험하면서 얻은 이치요의 삶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번역은 가장 신뢰할 만한 선집으로 꼽히는 신일본고전문학대계(新日本古典文學大系) 메이지(明治) 편 『히구치 이치요집(?口一葉)』(東京: 岩波書店, 2001)을 대본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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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
키 재기
탁류
십삼야
갈림길
나 때문에
주
해설: 히구치 이치요와 여성 표현의 근대
판본 소개
히구치 이치요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