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열정과 자유를 대변하는 울림이자,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는 사람들의 언어, 시(詩)
-시의 시대가 만들어낸 초상인 세 인물 ‘천샹, 망허, 예러우’
광활한 대륙 중국의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다. 어디를 가든 유랑하는 젊은 시인을 한 명쯤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낭만이 풍부했고, 젊은이들은 순수한 영혼을 품고 시를, 예술을, 그들이 행하는 자유의 몸짓을 동경했다. 그러니,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시인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일상 속으로 들어와서는 시와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가슴속에 진한 파문을 일으켜놓고는 사라져버릴 때, 순수의 시대를 살던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순수를 좇고자 했던 시의 시대가 만들어낸 초상이다. 시의 순결한 정신을 사랑했지만 훗날 그 사랑의 실체를 알고 정신적 붕괴를 겪어야만 했던 여인 천샹, 시인이면서도 절망의 늪에 빠진 후에야 자신이 진정으로 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남자 망허, 시가 가진 일탈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시를 갈망하는 여인 예러우. 이 세 사람이 시로, 사랑으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상실’은 장중한 세월의 깊이 속에서 슬프면서도 낭만적인 비극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의 비극이 잔인할수록 순수한 정신은 빛이 난다. 모든 것이 변질되고 소멸할지라도 그 속에 변할 수 없는 본질이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진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붕괴하거나 함께 변화하는 세 인물의 모습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작가, 장윈
지난 60여 년간 시대의 격변에 따라 중국문단에도 수많은 문학조류와 문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유랑하던 시인들의 낭만이 충만했던 1980년대, 물질의 치명적인 달콤함만을 좇으며 달렸던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 장윈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꾸준히 발전시켜온 작가로 중국문단과 독자들에게 특별한 평가받고 있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여 ‘상실’과 ‘방랑’을 바탕에 깔고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장윈은 담담한 서술, 엄격한 구조, 세련된 기술로 정제된 언어,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사유를 통해 순수문학의 정점에 올라서 있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현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서술함으로써 인간 군상들의 삶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키고, 몽롱하면서도 아득한 미학적 효과를 이끌어낸다. 그녀의 언어는 생생하면서도 우아하고, 솔직하고 명쾌하며, 순수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스스로를 ‘변방 작가’라고 칭하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루쉰 문학상 전국우수중편소설상, 자오수리 문학상 명예상, 장편소설상, 『중국작가』 다훙잉 우수작품상, 『베이징 문학』 우수작품상, 『상하이 문학』 우수작품상, 『소설월보』 백화상 중편소설상 등을 수상한 중국의 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군자와 협객, 시인을 길러낸 이 비옥한 문화의 땅은 영원히 날 매혹시키고, 또 영원히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것입니다.”
“글을 쓰는 건 외로운 일이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존엄한 일이기 때문에 일생토록 열정과 애정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건 한없이 행복한 일이며,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창조적인 생명력을 가진 일이기도 합니다.”
-‘루쉰 문학상’과 ‘자오수리 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발췌
한국의 문예지 『자음과모음』, 중국의 문예지 『소설계』 최초 동시 연재!
― 장윈 『길 위의 시대』, 박범신 『비즈니스』
지난 5월 한국의 『자음과모음』, 중국의 『소설계』, 일본의 『신조』가 함께 기획하고 준비해온 ‘문학 교류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3국의 문예지가 선정한 각국 작가의 단편소설을 동시에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이어 지난 8월, 『자음과모음』과 『소설계』는 장편소설의 동시 게재 또한 시도하게 되었다. 한국의 작가 박범신의 『비즈니스』와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중국의 대표 작가 장윈의 『길 위의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두 작품은 한국의 계간 『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와 겨울호, 중국의 격월간 『소설계』 2010년 5기(期)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두 책을 동시에 출간하게 되었다. 이는 아시아 문학 교류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실이라 더욱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 이어질 문학 교류에 있어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줄거리
장중한 세월의 깊이와 화려한 몰락! 슬프고도 낭만적인 비극의 결말은…….
1980년대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중국 장편소설. 천샹은 어느 지방 소도시의 대학교 4학년으로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그녀 앞에 어느 날 망허라는 시인이 나타난다. 1980년대는 유랑의 시대였고,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 시인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유랑길의 한 자락에서 망허가 자신의 신작 시 한 단락을 읊고 있는 모습을 천샹이 보게 되고, 그렇게 사랑에 빠져 하룻밤 정을 나눈다. 그는 이틀 후 도시를 떠났고, 천샹은 그렇게 떠난 그를 그리워한다. 두 달 남짓 시간이 흘러 천샹은 졸업을 하고, 학교에 남아 강의와 연구에 참여하기로 진로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학교 선배인 라우저우와 번개처럼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아기, 샤오촨. 사람들은 조산아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아이는 라우저우의 아이가 아니라, 망허의 아이었다.
망허는 권위 있는 학술기관으로 배치받았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영원히 똑같은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전차처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은 시인 망허를 지치게 했고, 결국 그 좋은 일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만들었다. 유랑길에 오른 망허는 산베이의 작은 도시 ‘미즈’라는 곳에 머물게 되고, 그곳에서 예러우를 만나게 된다. 망허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는 문학소녀 예러우는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지방을 돌며 현지답사를 하고 있었다. 산베이가 고향인 그녀가 이곳에 들른 것은 본격적인 답사를 떠나기 전에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땅을 밟아보기 위함이었다. 망허는 예러우에게 첫눈에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더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어가기 전에 예러우는 스스로 먼저 떠나버린다.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그녀의 모든 것을 떠올리며 망허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결국 그녀가 떠나려 하는 길의 여정을 생각해보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사후커우라는 어느 작은 도시에 도착한 예러우는 자신 앞에 나타난 망허를 발견하고는 머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함께 답사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예러우와 함께 걸어서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도는 망허. 정해진 잠자리 없이 둘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고, 그 마을마다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채집하고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여정을 이어간다. 한 걸음씩 함께 걸어 나가는 그 길이 때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두 사람이 ‘함께’라는 것. 그것은 그들의 영원한 밀월여행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머문 한 마을의 어느 집에서 잠을 청한 예러우와 망허. 한밤중 극심한 고통이 예러우의 잠을 깨웠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잔혹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샤오촨이 세 살 되던 해에, 천샹은 우연히 간 서점에서 망허의 새 시집을 발견한다. 하지만 책을 펼쳐 든 순간, 천샹은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떤다. 시를 사랑했고 그 사랑의 대가를 겸허히 받아들였던 천샹에게 청천벽력 진실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동안의 모든 것이 하나씩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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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북방에서 꽃을 피우다
1. 천샹과 시인
2. 아치형 창문
3. 산베이, 이 대담한 여인이여
4. 토굴에서의 하룻밤
제2장 아버지와 아들
1. 천샹과 라오저우
2. 기적
3. 샤오촨에게 쓰는 편지
제3장 봄바람에 유리기와 깨지네
1. 풍경
2. 베이구 산, 펑황청, 그리고 훙징톈
3.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제4장 반쪽 달이 떠오르다
1. 작은 도시의 밤
2. 예러우의 현지답사 노트
3. 사후커우, 사후커우
4. 묘비명
제5장 진실
1. 청춘에 죽다
2. 몸부림
3. 남쪽으로
4. 샤오촨의 시
제6장 바다를 마주하고 화창한 봄을 맞이하리
1. 모델하우스
2. 자오산밍의 나타샤
3. 한 그루 나무와의 만남
4.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네
해설
한국 독자들에게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