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뇌는 왜 텅 빈 상태를 원하는가?
이제껏 뇌과학이 말하지 않은 뇌 비우기의 비밀</B>
우리가 인간의 두뇌에 대해 논하거나, 전문가들이 연구하는 뇌과학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당연히 ‘무궁무진한 뇌의 능력’이다. 머리를 굴릴수록 잠재된 플러스 알파까지 끄집어낼 수 있다거나, 뇌가 알고 보면 엄청나게 유연하고 가소성 있는 기관임을 강조한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놀라운 복원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독일의 대표적인 뇌과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닐스 비르바우머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간의 두뇌를 이야기한다. 바로 “우리 뇌는 텅 빈 상태를 원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텅 빈 상태’나 ‘텅 빈 뇌’라는 말은 단순히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 휴식의 개념이 아니다. 수 초간 혹은 수 시간 동안이라도 사고와 감각이 멈춰서는 ‘무(無)’의 상태를 접하는 일을 말한다. 이는 마치 전력에 과부하가 걸려 불꽃이 튀고 퓨즈가 나갔을 때 일단 두꺼비집부터 내리는 행위를 비유로 들 수도 있겠다. 이때 두꺼비집을 내리는 행위가 바로 뇌를 텅 비우는 시도와 연결된다.
자연은 이 뇌 영역을 지칠 줄 모르고 밤낮으로 일하는 생각 펌프로 창조했다. 대뇌피질을 이렇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대뇌피질의 뉴런은 사방에서 전하를 계속 생성할 것이고 결국 전하는 너무나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발작 수준을 뛰어넘는, 아주 강력하고 당사자를 압도하는 대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중략)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으려면 두꺼비집이 설치되어야 한다. 두꺼비집 역할을 하는 것은 시상과 여기에 속한 신경전달물질 및 뉴런이다.
_본문 83쪽 중에서
다소 애매하게 여겨지는 ‘뇌를 비우다’라는 표현은, 이 책의 저자가 카운슬러나 심리학자가 아닌 뇌과학자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단순한 ‘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뉴런이 활성화되면 특정한 뇌파 패턴이 형성되는데, 이때 8~12헤르츠의 알파파(정상적인 성인이 긴장을 풀고 쉬는 상태에서 활성화되는 뇌파의 하나)가 발생하면서 텅 빈 상태의 최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피곤한 상태에서 머릿속으로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리면 알파파가 방출되는 것과 같다.
물론 알파파가 발생할 때만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불교에서 ‘공(空)의 상태에 이르는 훈련’이라 일컫는 깊은 명상의 수준에 이를 때에는 30~100헤르츠의 감마파(극도로 긴장하거나 복잡한 정신 활동을 수행할 때 활성화되는 뇌파의 하나)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뇌파가 느려야만 텅 빈 상태에 이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책의 저자도 고백하기를, ‘텅 빈 상태’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한다. 두 저자 역시 텅 빈 뇌의 상태를 정의내리기 위해 수많은 토의를 거치면서 서로의 생각과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이다’라는 정의까지는 내리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욕조에 몸을 담근 최적의 휴식이나 수면을 통해 ‘텅 빈 상태’를 만날 수도 있지만, 명상이나 섹스, 스카이다이빙 같은 스포츠나 특정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재즈연주 등 흔히 말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도 일순간 ‘텅 빔’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텅 비우기의 경험은 인간에게 생각보다 무해하지 않고, 오히려 휴식과 치유, 창의력과 에너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여러 실험과 데이터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B>멍 때리기 혹은 몰입과 자극으로
텅 빈 상태를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배우 제프 브리지스, 비틀스의 존 레논, 육상선수 칼 루이스 등 이들에게는 공통된 휴식 방법이 있었다. ‘부유탱크’가 그것이다. 사람 한 명이 몸을 누이면 꽉 들어찰 만한 견과류 모양의 탱크인데, 이 탱크에 사해(死海)처럼 사람이 떠 있을 수 있을 농도의 소금물을 체온과 비슷한 수온으로 채워 넣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둥둥 떠 있게 하는 것이다. 일단 이곳에 들어가면 청각, 시각, 촉각 외에도 자기 몸에 대한 고유 감각이 줄어들어 기분이 꽤 좋아지거나 긴장이 풀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실제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감각이 풀어진’ 상태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명상을 할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렇듯 텅 빈 상태가 되면 뇌파의 바다에서 절대적이고 무관심한, 즉 집중력이라는 바위가 불쑥 튀어나온다. 뇌에서 약한 고주파의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뇌파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멍 때리기’라는 다소 희화적인 표현으로 ‘아무 생각 없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멍 때리기의 시간을 얼마나 완전무결하게 뇌 비우기의 시간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참된 휴식과 에너지 충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특히 ‘텅 빈 상태’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종류로 몰입과 자극을 강조한다. 인간의 일상 가운데 무아지경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순간들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라. 절정을 체험하는 섹스, 수많은 군인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발맞추어 걷는 동보(同步) 행진, 단순한 멜로디라도 리듬과 비트가 강한 재즈나 록 음악을 듣는 일 등 몰입 혹은 자극의 순간이 오면 뉴런이 저주파 알파파나 세타파 패턴으로 발사된다. 이 패턴은 긴장이 풀린 각성 상태나 잠들기 직전의 몽롱한 단계에서 나타나는 패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은 텅 빈 상태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득을 얻는다고 증언한다. 어떤 이는 텅 빈 상태를 느낀 뒤에 “연료가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밝힌다. 또 어떤 이는 텅 빈 상태로부터 창의적인 충동과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고 말한다. 아울러 명상을 하면 이와 비슷한 방향의 이득을 얻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중략)
텅 빈 상태는 긍정적인 효과와 연관이 있다는 견해는 사실이므로 당연히 보상중추에서 활성화가 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 텅 빈 상태를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긍정적인 차원의 텅 빈 상태를 만들어내려 노력해도 괜찮을 것이다.
_본문 113쪽 중에서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은 뇌가 텅 빈 상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물론, 텅 빈 상태에 이르는 메커니즘을 상세히 설명한다. 하지만 위에 적은 일상에서의 체험뿐만 아니라 저자는 더욱 급진적인 상황까지 이 주제에 대입시킨다. 바로 텅 빈 상태라는 질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다름 아닌 뇌전증(간질), 우울증, 루게릭병, 치매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당연히 치명적으로 인식되는 이들 질환이 사실은 생각만큼 극단의 좌절을 겪을 병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질환을 앓는 환자는 결국 자아를 망각하고 텅 빈 상태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전혀 두렵거나 괴롭지 않으며 오히려 평온과 고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거센 반박과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뇌과학자인 저자는 실제 감금증후군 환자(루게릭병으로 인한 전신마비 환자)의 뇌에 측정 칩을 장착했다. 그러고는 그에게서 평온과 행복감이 들 때 방출되는 뇌파와 전류의 변화를 발견하며 이 사실을 증명해냈다.
환자들은 감금 상태의 단계가 심각할수록 삶의 질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다름 아닌, 온몸이 감금 상태에 빠져 더 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난히 삶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으로 보였다.
_본문 284쪽 중에서
이 실험을 통해 저자는 감금증후군 환자들이 기쁘고 즐거워하는 상태에서 뇌 속의 연상회가 강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연상회가 활성화되면 봉쇄 신호를 편도체와 다른 방어체계 부위에 보내게 되는데, 이때 방어체계가 차단되는 과정은 긍정적인 텅 빈 상태를 체험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마비환자가 텅 빈 상태에 도달하여 평온을 찾는다는 저자의 급진적인 주장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이는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이러한 텅 빈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이론으로 바꿀 수 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주변 사물이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아 텅 빈 상태와 같은 무의미한 경지에 다다르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최소한 이따금씩이라도 ‘텅 빔’을 체험하기 위한 시도들, 가령 스포츠나 섹스, 음악, 명상, 부유탱크, 그 밖에 여러 가지 ‘비우는 기술’을 끌어다 이용해야 한다. 감금증후군 환자들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은 ‘텅 빈 기술’을 굳이 추구하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이러한 텅 빈 상태를 행복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너무 과대평가된 뇌의 능력,
하지만 뇌는 잠시라도 멈춰 있길 원한다
이 책의 독일어판 원서 제목은 《뇌는 과대평가되었다(Denken wird ?bersch?tzt)》이다. 뇌의 영역과 구조, 여러 기관의 고유 기능, 뇌파와 호르몬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 보면 저명한 이 뇌과학자가 일반 독자들이 읽는 과학 교양서에 이토록 전문적인 설명을 애써 곁들인 이유가 무얼까 되짚어보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원서 제목처럼 그동안 우리가 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너무나 과대평가해왔으며, 기대 이상의 잠재력을 요구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을 비워라”라는 조언이 아니라, 뇌와 정신의 정확한 메커니즘을 알려줌으로써(혹은 증명함으로써) 뇌의 기능을 과신하지 말라는 저자의 간절한 주문이다.
뇌 또한 인체의 한 부분이기에 장시간 전류를 차단한 채 로그아웃 되어 있는 시간이 절실하다. 또는 무력해지고 손상된 근육을 물리치료 받는 것처럼, 자극과 몰입의 뇌파를 만듦으로써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텅 빈 뇌’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다.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이 다루는 분야는 과학만이 아니다. 뇌과학은 물론 철학, 종교, 심리학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과학과 인문학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인간의 두뇌에 대한 ‘통섭’의 시각으로 텅 빈 뇌에 대해 다룰 수 있는 모든 면을 두루 거론한다.
세계적인 뇌과학자 닐스 비르바우머와 과학저술가인 외르크 치틀라우, 이 두 저자는 전작인 《뇌는 탄력적이다》라는 책도 함께 저술하여 뇌과학을 더욱 종합적인 사고로 다룰 수 있는 내공을 증명하였다. 뇌의 가소성과 복원력 등 우리 뇌가 어디까지 진화하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춘 전작과 달리, 이 책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은 원제대로 ‘생각은 과대평가’되었으며, 텅 빈 상태야말로 인간의 삶의 기원이자 마지막이라는 점을 적극 강조한다.
이 책은 단순히 이론을 소개하는 과학서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에게 고통과 번민이 덜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또한 《머리를 비우는 뇌과학》이 지닌 독창적인 요소 중 하나다. “도대체 텅 빈 상태에 대해 책을 쓸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닐스 비르바우머와 외르크 치틀라우는 이렇게 쉽게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작업을 거뜬히 해냈다”는 독일 아마존 어느 서평자의 격찬은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소감이기도 하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뇌를 비운다는 개념과 표현은 정통 뇌과학에서 그간 잘 다뤄오지 않은 문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저자들 자신조차도 텅 빈 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다만 생각하고 감각으로 느끼는 평상시의 의식에서 벗어난 백지 상태, 혹은 극한의 몰입과 자극의 상태를 ‘텅 빈 뇌’의 도착점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추상적이면서 난해하기까지 한 주제를 저자들은 방대하고 정교한 실험 데이터를 통해 구체적으로 입증하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삶과 죽음이 언급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과 죽음이 공통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생은 무에서 나오고 죽음은 무로 돌아간다는 것,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죽음에 임박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심장이 멈춘 순간 평화와 쾌적함에 사로잡혔고 더 나아가 극도의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의 맺음말에서 내는 결론 또한 마찬가지다. 텅 빈 상태의 완전무결한 마무리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텅 빈 상태의 긍정성을 생각하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은, 우리의 삶 또한 고통과 번민에 사로잡혀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만만치 않은 철학과 전문적인 뇌과학 이론이 수시로 등장하기에 독자들은 계속 머리를 굴리며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그래, 생각에 집착하지 말자. 때로는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며 현실적인 고통에서 떠나보는 연습을 하자’라는 마음을 먹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저자가 원하는 결론이다. 이 책의 부제처럼 너무 많은 생각이 우리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뇌는 탄력적이다》 외에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인기 작가다.
철학·생물학·스포츠의학을 전공한 후 다년간 교수와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디 벨트(Die Welt)》 《자연+우주(Natur + Kosmos)》 《오늘날의 심리학(Psychologie heute)》 등 많은 언론 매체에서 활동했고, 현재 가족과 함께 브레멘에 거주하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머리말 | 낙하산을 타고 텅 빈 상태로 뛰어들다
1장 무언가 항상 움직여야 한다
: 왜 인간은 텅 빈 상태를 삶에서 몰아냈을까?
2장 마침내 자유로워지다
: 철학자들, 텅 빈 상태를 성찰한 선구자
3장 긍정적인 자극을 찾아서
: 텅 빈 상태에서의 뇌파
4장 방어체계에서 빠져나오다
: 생각을 비우게 하는 뇌의 영역
5장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 자동 조종 장치를 켠 뇌
6장 무의미가 행복이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7장 텅 빈 상태에 이르려면 어떻게 훈련할까?
: 섬엽의 활성화, 그리고 선 명상
8장 무아지경을 향한 욕망
: 섹스, 종교, 뇌전증의 공통점
9장 리듬 혹은 그루브의 미학
: 음악은 우리를 어떻게 이끌까
10장 텅 빈 상태라는 질병
: 그리고 이 질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11장 잘못된 몸에 깃든 올바른 삶
: 감금증후군 환자의 행복
맺음말 | 텅 빈 상태는 삶의 처음이자 끝이다
옮긴이의 말 | ‘텅 빔’을 향한 도발적인 뇌과학서
주석